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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투어
투어시간 09:00 ~ 17:00
최소인원 3명
비용 ₩99,000원 ($90.00)
코스 호텔 픽업 >  수원화성 >  화성열차 >  화성행궁 >  중식 >  창덕궁 >  종묘 >  자수정 또는 인삼센타 >  호텔 앞 하차
포함사항가이드 차량 입장료 중식 (음료는 불포함)
결재 현금 및 카드결재
취소예약과 동시 선 결재 , 예약이후 투어일 기준 24시간 이후 취소는 100% 취소료 청구
주의사항
  • 1. 월요일에는 창덕궁 휴관으로 경복궁 관광으로 진행 됩니다.
  • 2. 화요일에는 종묘 휴관으로 인사동 관광으로 진행됩니다.
  • 3. 당일 기상상태에 따라 화성열차는 취소될 수도 있습니다.





수원화성의 역사적 배경


조선 성곽 건축의 꽃, 수원화성은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이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부친의 원침을 수원 화산으로 옮긴 후 1796년 9월 완공된 성입니다.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

(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었다.(남수문 2012년 6월 복원 완료)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ㆍ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화성성역의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서북공심돈(보물 제1710호), 방화수류정

(보물 제1709호)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장안문(長安門)




         장안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북쪽 문으로 수원화성의 정문이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5일 마쳤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들의 안녕을 의미한다. 장안문은 우진각 지붕(지붕면이 사방으로 경사지게 되어있는 형태)으로 규모가 웅장하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팔달문(八達門)




           팔달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남쪽 문으로 남쪽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정조대왕과 당대 국왕들이 현륭원을 가기 위해 이곳을 통과했다고 

        한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15일에 완공하였다. 팔달문은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사통팔달'에서 비롯한 이름이며 축성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2호로 지정되었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화서문(華西門)




        화서문은 화성의 4대문 중 서쪽 대문이다. 1795년(정조 19) 7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 1월 8일 마쳤다. 화성 서쪽의 남양만과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며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성문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공심돈은 적의 동향을 살핌과 동시에 공격도 가능한 시설로 수원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1796년(정조 20) 3월 10일 완공된 서북공심돈은 3층 건물로 아래쪽

        부분의 치성(雉城)은 석재로, 위쪽 부분의 벽체는 전돌로 쌓았다. 내부는 전투에 편리한 구조를 갖추었으며 계단을 통해 오르내렸다. 1797년(정조 21) 1월 

        화성을 방문한 정조는 서북공심돈을 보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며 매우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독창적인 건축형태와 

        효과적인 재료 활용을 보여주는 서북공심돈은 역사적, 학술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다.



동북각루, 방화수류정(東北角樓, 訪華隨柳亭)




        방화수류정은 1794년(정조 18) 10월 19일 완공되었다.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와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의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다.“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訪花隨柳)”라는 뜻을 지닌 방화수류정은 독특한 평면과 지붕형태때문에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화성에서 가장 뛰어나며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




화성행궁(華城行宮)




정조의 원대한 꿈과 효심이 느껴지는 화성행궁은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경복궁만큼 아름다운 궁궐로 손꼽힙니다.

사적 제478호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 13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 되었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 내의 광주부행궁 등이 있고, 온양행궁은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 조선 세종이래 역대 왕이 즐겨 찾던 곳이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 바로 화성행궁이라 할 수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에서 1795년(정조 14∼19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부 유수(留守)가 집무하는 내아(內衙)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

(정조 24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純祖) 1년(1801)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 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576칸으로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며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낙남헌을 제외한 시설이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으로 사라졌다. 1980년대 말, 뜻있는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꾸준하고 적극적인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마침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되어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 되었다.



수원화성 어차 안내도




이용료 어른 3,000원, 군인 및 청소년 2,000원, 어린이 1,000원 

운행구간 연무대 → 화홍문 → 화서문 → 팔달산 → 화성행궁 → 팔달문 전통시장 → 수원화성박물관 → 연무대


 회차

1

2

 3

5

 6

10 

11 

12 

연무대

10:00

 10:30

11:00

11:30 

13:00 

13:30 

14:00

14:30

15:00 

15:30 

16:00

16:30

수원화성

 10:00 

  10:30 

 11:00 

11:30 

13:00 

13:30 

14:00

14:30

15:00 

15:30 

16:00

16:30




창덕궁의 역사


500년 조선왕조 중 258년이란 가장 오랜 세월 동안 임금이 머물렀던 궁궐




창덕궁은 태종 5년(1405) 정궁인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은 궁궐이다. 조선을 창건한 이래 ‘왕자의 난' 등 골육상쟁의 비극의 역사를 지닌 경복궁을 법궁으로 사용하는 

것을 꺼린 까닭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한 창덕궁은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선조는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의 복구를 선조 40년(1607)에 시작하였으며, 창덕궁은 광해군 2년(1610)에 중건이 마무리 되었다. 그 후 창덕궁은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인정전을 

제외하고 또다시 불에 타는 시련을 겪는다. 인조25년(1647)에 복구되었으나 크고 작은 화재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특히 1917년 대조전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소실되는 대화재가 일어났다. 이때 창덕궁을 복구하기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을 비롯한 강녕전 동ㆍ서 행각 등의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총 258년 동안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하며 정사를 편 궁궐이다.



                  조정의 각종 의식과 외국 사신 접견 장소였던 인정전



                     인정전은 태종 5년(1405)에 창덕궁을 세우면서 함께 지었다. 그 뒤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으며, 현재 건물은 순조 4년(1804)에 지어졌다.



                            궁궐의 정문중 가장 오래된 돈화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지금까지 전해오는 여러 궁궐의 정문들 중 가장 오래된 정문이다. 2층으로 세워진 돈화문은 태종 12년(1412)에 세웠는데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린 것을 광해군 원년(1608)에 다시 완공시켰다. 돈화문은 중국의 유교 경전인 <중용>의 ‘대덕 돈화'에서 따온 말이다. ‘대덕돈화'는 ‘어진 마음으로 백성을 

가르치고 사랑하겠다'는 뜻이다.



창덕궁의 특징


자연과 건축이 물 흐르듯 조화를 이룬 창덕궁


북한산의 매봉 기슭에 세운 창덕궁은 다른 궁궐과는 달리 나무가 유난희 많다.

자연의 산세를 살려 건축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궁궐이다 경복궁의 주요건물들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에 놓여있다면 창덕궁은 산자락을 따라 건물들을 골짜기에 

안기도록 배치하였다. 따라서 한국 궁궐 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한다. 경복궁에 이어 법궁으로 쓰인 창덕궁은 경북궁의 웅장함과는 달리 화려하고 섬세한 

여성미를 보여준다. 또한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들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시대의 건축의 특징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궁궐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뛰어난 조경을 보여주는 창덕궁의 후원



창덕궁의 후원은 ‘비원'이라고도 불린다. 후원의 아름다운 조경 때문에 사람들은 창덕궁보다 후원을 더 많이 기억한다. 창덕궁의 후원을 통해 조선시대 궁궐의 

조경양식을 알 수 있다. 후원에는 160여 종의 나무들이 있으며, 그 중에는 300년이 넘는 나무도 있어 원형이 비교적 충실히 보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조경이 훼손되지 않고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귀중한 장소이다.




           종묘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종묘는 태조 3년(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 하였으며, 곧이어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정전에서 매년 춘하추동과 섣달에 대향을 지냈고, 영녕전에는 매년 춘추와 섣달에 제향일을 따로 정하여 제례를 지냈으나 현재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을 정하여 종묘제례라는 제향의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제사드릴때 연주하는 기악과 노래와 무용을 포함하는 종묘제례악이 

거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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